신약성경을 묵상하다 보면 항상 마주하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요한복음 3장에서 거론되는 '거듭남(Born Again)'이라는 문제다. 오늘은 독자 여러분과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져 있다는 사실을 밝혀보고자 한다. 예수 탄생 이전 구약시대의 관점으로 보자면 선민 유대인을 제외한 모든 세계 사람들은 피부색과 무관하게 이방인으로 분류되었다. 신약 성경의 관점은 구약시대와 조금 달랐다. 혈통적 히브리인 민족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고 나머지 한 부류의 사람들이 더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없이 누구든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그들은 인종과 국적 언어를 초월한 제 3의 종족이라 불리었다. 신약시대 초기는 요즘처럼 기독교가 갈기 갈기 찟어져 있지도 않았고 각종 사이비와 이단들도 생기기 전이었다.
거듭남은 하나님 나라 이주에 필요한 시민권과 같은 문제
바리새인이면서 유대인의 관원(공무원)이었던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밤중에 예수께 나아와 나눈 대화중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3절)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5절)
'거듭나다'라는 용어는 이제 기독교만의 용어가 아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어느곳에서든지 별 거부감없이 다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사회적 용어로 굳어진 '거듭남'이란 '하나님 나라'와 무관한 것들이다. 해서 오늘 본론에서는 이런 문제는 거론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위 3절과 5절 가운데 보여진 '거듭남'과 '하나님 나라' 간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좀더 많은 얘기를 하고자 한다.
거듭남의 궁극적인 이유와 목적은 무엇인가? 왜 거듭나야 한다고 예수께서 두번씩이나 강조하셨던가? 이 문제는 '하나님 나라' 즉 다시는 죽음이나 슬픔이나 울부짖음이 없고 고통이 없는 나라, 전능하신 주 하나님과 그 어린양이 항상 계신 그곳, 구원받은 자들의 민족들이 그 도성의 빛 가운데서 거니는 곳,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수정처럼 맑은 생명수의 정결한 강이 흘러 넘치는 곳, 강 양편에는 생명나무가 있고 12가지 과실이 달마다 맺히며 그 나무의 잎사귀들은 민족들을 치유하기 위해 있는 그 곳에 대한 실제적인 동의와 믿음이 없이는 다 부질없는 쇼맨십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지상에서 하나님 나라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거듭남이란 필요충분 조건이란 말이다. 거듭나도 좋고 거듭나지 않아도 좋은 그런 문제가 아니다.
거듭남이란 아들의 신분을 얻기 위한 필요충분조건
바울이 로마에서 갈라디아 지방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쓴 편지글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내가 말한다. 그 상속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지만 어린아이였을 동안은 종과 다를바 없으며 아버지가 미리 정해 놓은 때까지 보호자와 청지기 아래 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어린아이였을 때에는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서 종노릇 하였지만 그 때가 차니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시어 여자(마리아)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구속하셔서 우리로 아들의 신분을 얻게하려 하심이다.
너희가 아들들이므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영을 너희 마음속에 보내시어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하셨다. 그러므로 너는 더 이상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상속자녀이다.(갈4:1-7)
인간이 거듭나는 문제는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성령)과 그분의 아들의 영(성령)이 각자의 심령에 거하는 문제이므로 결코 가볍게 볼 문제가 아니다.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것이 인간이라고 했다.
거듭남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
바울이 로마 네로 황제의 법정에 불려나가기전 에베소 교회 첫째 감독으로 임명받은 디모데에게 쓴 편지글을 보면 거듭난 사람들을 택함받는 사람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뿐아니라 이 세상에서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거듭남은 그리스도인의 첫생명의 시작이기도 하지만 좀 더 시간이 흐르면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란 사실도 알게된다. 바로 아래 구절이 잘 설명해주고 있다.
나의 복음대로 다윗의 씨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지셨음을 기억하라. 이 복음으로 인하여 내가 악을 행하는 자처럼 매여서까지 고난을 받고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택함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는 것도 그들 역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고싶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신실하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것이다. 우리가 참으면 우리도 그와 함께 다스릴 것이요 우리가 그를 부인하면 그도 우리를 부인할 것이다. (디모데후서 2:8-12)
우리는 살기 위해서 한 번 죽어야 한다. 시간이라는 물리적인 한계로 맞이하는 죽음은 당연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이란 자연법칙에 의한 죽음이 아니라 인간의 양심과 영에 대한 문제를 말한다. 살아있지만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에 처하는 그 사건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영원한 부활 생명을 얻을 수 없다. 성경을 이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찾고 있지만 그분은 너희에 대하여 약하지 아니하시고 너희 안에서 강하시다. 그분은 약하심으로 십자가에서 못박히셨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신다. 우리 역시 그분 안에서 약하지만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분과 함께 살 것이다.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스스로 입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것을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못하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들이다.(고린도후서 13:3-5)
너와 내 안에 곧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존재가 살아계시지 못하면 다 소용없는 일이라는 말이다. 누가 하나님의 인격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라는 물음은 인간 심연에 있는 존재의 변화를 요구하는 물음이 아닐 수 없다. 거듭남이란 바로 이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렇다 거듭남이 우리에게 왜 필요한 것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을 정복하고 영원히 그분과 함께 살기 위해서이다. 거듭난 생명(하나님의 영, 거룩한 영, 예수그리스도의 영)이 없이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이제 생각해보라. 이 세상이 거듭난 사람으로 충만한가? 전 세계 기독교 종교인구가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거듭난 기독교인의 수는 얼마일까? 거듭난 사람들의 숫자와는 무관하다해도 어떻게 이 세상은 이토록 범인들이 살아가기에 처연한 곳이 되고 말았을까?
결론
이 세상은 두 부류의 사람이 살고 있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거듭난 사람'과 '거듭난 적이 없는 사람'이다. 사람들이 죽어서 낙원(천국,천당,극락 그 무엇으로 불리든 상관없다)에 가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기독교에서만큼은 사후 생과 부활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설명도 매우 구체적이다. 그야말로 인간이 바라는 모든 이상향이 그 곳에 준비되어있다. 인간을 창조하신 조물주께서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향연을 그곳에 마련해두셨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오호통재라 그 이상향 낙원에 이르는 길이 이토록 멀고 험할 줄이야!
이 세상은 그 이상향을 향하여 나가는 첫관문일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시간과 환경을 제공해주셨다. 물론 사람들의 형편은 조금씩 다를 수도 있겠다. 이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과 실제적인 동의를 수락하는 사람이라면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에 귀기울여야 할것이다. 아울러 그분의 아들의 신분을 얻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을 정복하는 복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귀있는자는 들을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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