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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고 잘 짓세 우리 집 잘 짓세

그리스도를 따르기 이전의 삶

by 마르코 권 2024. 9. 15.

필자는 기독자가 그리스도를 따르기 이전의 삶에 대하여 3번씩이나 동일한 모티브로 이야기하고 있는 구절을 발견하고 적잖이 놀랐다.

그곳은 누가복음 15장인데 독자여러분께서도 많이 들어보셨으리라 믿는다.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품을 떠나 사는 동안 그 사람은 죽었던 자라고 말씀하신다.

아버지의 품을 떠난 상태는 100마리의 양 가운데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신세요, 어떤 여인이 집안에서 잃어버린 은화 한 닢과도 같다. 돌아온 탕자 이 세가지 이야기는 모두 한 주제를 가지고 있다.

돌아온 탕자의 아버지가 남긴 한마디 말 속에 하나님 아버지의 품을 떠나 살았던 모든 시절은 모두 죽음가운데 살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바로 다음 구절이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그를 잃어버렸다가 찾았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기 시작하더라(눅15:24).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잃어버렸다가 찾았으니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니라(눅15:32).

만약 갓난아이가 생명의 젖줄을 잃어버리거나 전쟁중에 부모와 헤어져 고아가 된다면 그 아이가 살아 돌아올 확률이 있을까? 마찬가지로 잃어버린 은화 한닢, 광야 길에서 목자의 시야에서 사라진 한마리 길잃은 양, 아버지 집을 제발로 떠난 어린 아들, 모두 같은 처지다. 기근을 당하여 돼지를 치는 품꾼이 되었던 아들은 먹을 것이 없어 극심한 굶주림 끝에 자기 아버지집에서 풍요로이 거하던 종들을 떠올리지 않았던가? 아래 아들의 독백이 더 절박하게 다가온다.

그제야 그가 정신을 차리고 이르되, 내 아버지께는 빵이 풍족하여 나누어 줄 수 있는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나는 굶어 죽는구나(눅15:17).

예수를 몰라도 하나님을 몰라도 한 평생 밥 잘먹고 돈 잘 벌고 시집장가 잘가고 자식새끼 잘낳고 잘키우며 남에게 피해주지 않고 잘 살다가 편안하게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것은 참 등따시고 배부른 생각이라는 것을 알수 있다. 인생 60~80 사는 동안 무사태평으로 일관된다면냐 얼마나 좋을까? 불과 74년 전만해도 우리 부모세대는 한국 전쟁을 겪었다. 조부모 세대는 대한제국 몰락과 일본 식민지배를 당했다. 이 모두 겨우 80년 안에 일어난 일들이다. 2024년 이후 80년 안에 대한민국에 무슨 천재지변이나 인재가  일어날런지 아무도 모르고 그저 산다. 하루 하루 무탈하게 사는 이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필자의 결론은 이것이다. 조물주께서 보시기에 우리 인생이 꼭 예수께서 말씀하신 비유담 같다는 것이다. 본래 인류의 아버지는 조물주 하나님 아니신가? 하나님이라는 호칭을 기독교에서 독점해 씀으로 다소 반감을 가질 수는 있겠지만 인류를 이 땅에 존재케한 절대자 조물주는 반드시 계시다고 믿는다. 집을 떠나는 순간부터 개고생이라는 세간의 말도 있듯 인류는 하나님 집을 제발로 떠나는 순간 고생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좌절하거나 실망할 필요는 없다.

"그제야 그가 정신을 차리고"

집떠난 아들에게 기적처럼 일어난 일이다. 우리 모두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나면 희망이 있다. 즉시 옷매무시를 추스리고 아버지 집으로 달려갈 일만 남았다.

나를 반가이 맞아주실 아버지께로...

마지막 휘날래이다.

일어나서 자기 아버지께로 가니라. 그러나 그가 아직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그에게 입을 맞추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그를 잃어버렸다가 찾았노라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잃어버렸다가 찾았으니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자(눅15:20,24,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