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래없는 첫째 아들 혐오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나?
우크라 전쟁으로 러소포비아가 한창인 요즘 성경에도 이와 유사한 사례가 있어 오늘 소개해보고자 한다.
독자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시는 성경이야기중 '돌아온 탕자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의 발단과 전개 그리고 결과는 한번즈음 모두 들어보셨으리라 생각한다. 스토리 거의 끝무렵, 탕진하고 돌아온 동생을 앞에두고 아버지와 큰아들이 나눈 대화를 상기시켜 보면 대략 이렇다. 인용한 성경구절은 누가복음 16장이다.
큰아들이 들에 있다가 집 가까이 왔을 때 노래와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종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인지 물었다. '당신의 동생(둘째 아들)이 돌아와 당신의 아버지께서 살진 송아지를 잡아 건강하게 돌아온 그를 환영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큰아들은 화가 나 집에 들어가기도 싫었다. 이어서 큰아들은 아버지께 말한다. "저는 수년 동안 아버지를 섬기고 어느 때라도 명령을 거역한 적이 없지만 아버지는 제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마리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살림을 창녀들과 더불어 탕진해버린 저 아들이 돌아오자마자 그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셨나이다." 이하 하략...
돌아온 탕자 이야기에 나오는 큰아들은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로운 아흔아홉 사람보다 회개하는 한 죄인으로 인하여 더 기쁨이 있다(누가복음15:7,10).' 는 구절 때문인지는 몰라도 돌아온 탕자에 비해 그 존재감이 묻혀버리는 감이 없지 않다. 아버지 집으로 돌아온 작은 동생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다는 점에서 모든 사람들은 큰아들의 마음 씀씀이에 대해 호감을 갖지 못하는 게 사실이긴 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첫째 아들의 존재감이나 선행이 둘째 아들에게로 송두리채 빼앗겨버린 사건이 벌어졌다. 성경 어디에? 마태복음 21장에서 그 일이 벌어졌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과 말씨름이 시작되었다. 그 때 하신 비유담 중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에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하략(개역개정)
그런데 웃기는 일이 그 다음에 일어난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에게 가서 말하기를 '아들아, 오늘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하니 그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가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하더니 나중에 뉘우치고 갔으며, 둘째에게도 가서 그와 같이 말하니, 그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예, 아버지 가겠나이다'라고 하고는 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 둘 중에 누가 그 아버지의 뜻을 행하였느냐?라고 하시니, 그들이 주께 말씀드리기를 첫째 아들이라 하거늘...하략(흠정역, 한글킹제임스)
분명히 이건 성경 번역자의 의도적인 실수일까?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영어성경 거의 모두는 "첫째 아들"로 결론났다.(RSV, DARBY, NIV, NLT, NET, MSG, AMP 등 등) 국내 시판중인 한글 성경중 "첫째 아들"로 결론난 것들은 바른성경, 새번역, 쉬운성경, 우리말, 카돌릭, 현대어, 흠정역, 한글킹제임스 성경 등등이다.
반면 "둘째 아들"로 결론난 성경은 영미권성경에서는 찾을 수 없었고 국내 성경 가운데 개역한글, 개역개정, 쉬운말, 현대인의 성경 등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온 말씀은 위 두가지 중 분명 한 쪽일 것이다. 독자 여러분은 어떤 쪽을 택할 것인가? 어느 한 쪽은 예수 그리스도의 반대편에 선 것이라 보면 되겠다.
이 대목에서 바울 사도의 외침이 들려온다.
너희가 본래의 돌올리브 나무에서 꺾여 본성을 거슬러 참올리브 나무에 접붙여졌는데, 하물며 본래의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본래의 올리브 나무에 얼마나 더 잘 접붙여지겠느냐?(로마서 11:24).
이방인들(둘째아들)의 충만함이 차기까지는 이스라엘의 일부가 완고하게 된 것, 이것을 바울은 '신비'라고 했다. 결국 온 이스라엘(첫째 아들)은 구원을 받게 될것이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그들 모두(첫째아들,육체의 이스라엘)를 믿지 않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둘째아들,이방인으로서 구원받을 자)에게 자비를 베풀려 하심이라. 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분의 심판을 어찌 헤아리며 그분의 지나간 길을 어찌 찾아내리요? 누가 주의 생각을 알았느냐? 누가 그분의 의논자가 되었느냐? 누가 먼저 그분께 드려서 되돌려 받겠느냐?(로마서11:32~35).
결론
인류 역사 2천년 동안 사단이 기독교의 근간인 '성경'을 하나님이 두려워 가만 놔두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사람이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로 극심한 고난과 박해가 있던 시절에는 사람들이 성경을 생명처럼 여기고 목숨을 바쳐 간직하고 후대에 물려주었다. 그러나 여수룬이 살찌자 걷어 찼도다. 네가 살찌고 네가 굵어지고 네가 기름으로 덮이니 그가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렸고, 자기 구원의 반석을 가볍게 여겼고(신명기32:15)... 이 세상은 재미난 일들이 차고 넘친다. 돈앞에 사람들이 굽신거리는 시대다. 금융가나 자본이 세계 질서와 경제를 주무르고 있다. 정치, 교육, 사업, 문화 예외없이 모두 이 돈을 위해 앞다투어 경쟁하며 살고 있는 현실이다. 부정하지 않는다.
주가 말하노라. 그러나 이러한 사람은 내가 보살피리니 곧 영이 가난하고 통회하며 내 말에 떠는 자라(이사야 66:2).
풍요로운 시대, 대한민국 이 땅에 이 말씀에 합당한 사람이 많아지기를 간절히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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